자원 관리로서의 게임

개떼 공격에 대한 비판을 기억하십니까?

소위 2세대 RTS라고 하는 워크래프트 2와 C&C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그리고 기타 고만고만한 실시간 전략 게임들이 발돋움을 하던) 시절, 게이머들 사이에는 '전술은 없고 개떼 공격만 있다'라는 비판이 많이 있었죠. 그에 대한 대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산이라는 개념은 없고 제한된 유닛만으로 게임을 진행하는 'Myth'라는 게임이 나와서 인기를 끌기도 했구요(2편까지 나왔죠). 그러나 스타크래프트에 이르러서는 개떼공격이 '러쉬'라는 멋진 이름까지 얻으면서 가장 유효한 전략 또는 전술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개떼공격에 대한 논의는 거의 사라져 버렸구요.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게임 플레이의 초점이 유닛 콘트롤에 의한 국지전이 아니라 '자원 관리'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또는 자원 관리라는 초점을 게이머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르겠죠). 러쉬니 빌드 오더니 하는 용어들은 모두 게임 플레이의 초점이 자원 관리로 넘어갔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들입니다.

사실 RTS는 실시간 전술(tactics) 게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시간 '전략(strategy)' 게임입니다. 전략과 전술은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전쟁론이나 병법 차원에서 볼 때 전술은 단기적이고 국지적인 전투에 관련이 있는 반면 전략은 장기적이고 전역적인 '전쟁'에 관련이 있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 문제라면, 병참과 보급, 신무기 등등 '자원 관리'가 승리의 주된 요인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당시 개떼 공격을 비난했던 것은 실시간 전략 게임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족을 달자면, 한국 역사를 보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적군을 꺾었던 예는 별로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인 예겠지만, 국내의 게이머들은 소수의 정예와 기발한 전술로 대군을 물리쳤던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낄 것입니다. 반면 RTS를 만든 미국의 현대 전쟁사를 보면 베트남전이나 걸프전처럼 화력을 쏟아 부어서 적을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개떼 공격에 대한 비판이 국내에서 더 많이 일어났던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요....

자원 관리의 관점에서 본 게임 장르들

자원이라는 관점에서 게임들을 보면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들이 보입니다. 그럼 RTS를 제외한 기타 게임 장르들을 자원 관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죠(좀 억지스러운 면도 있지만...)

어드벤처

어드벤처와 자원 관리... 그리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좀 억지스럽겠지만, 그래도 굳이 관계를 만들자면 이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드벤처에서의 자원 관리란, 제자리에 있지 않은 자원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문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있어야 하고, 열쇠를 얻으려면 어떤 인물에게 어떤 책을 찾아 줘야 하고, 어떤 책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인물에게 어떤 상자를 갖다 줘야 하고... 등등등. 대부분의 어드벤처 게임들이 그런 설정들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쇄 관계의 마지막 말단에는 간단한 퍼즐이 등장하기도 하구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드벤처에서 스토리와 플롯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자원 제자리 찾기와 퍼즐이 되지 않을까요...

RPG

아주 단선적인 몇몇 RPG들을 제외한다면 RPG도 상당히 복잡한 자원 관리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PG 역시 스토리와 플롯, 그리고 전투 시스템을 빼면 남는 것은 자원 관리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죠. RPG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돈과 경험치겠죠. RPG의 초점은 인물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물을 원하는 방향으로 원활하게 발전시키려면 돈과 경험치를 아주 잘 써야 합니다. 또 어떤 RPG는 레벨이 올라가면서 체력이나 마력, 특정 기술 점수 등을 선택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죠. 그런 것 역시 자원 관리입니다... FF7의 마테리아 시스템도 본질적으로는 자원 관리구요....

RPG 제작의 측면에서도 자원 관리에 대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HP가 100인 레벨 1의 캐릭터가 한 번의 전투에서 평균적으로 HP를 50 잃고 100 골드를 얻는다고 했을 때, 그리고 레벨 2로 올라가려면 평균 10번의 전투를 치뤄야 한다고 했을 때, HP를 50 올리는 약의 가격이 100 골드보다 비싸면 이론적으로는 그 캐릭터는 살아남지 못합니다(두 번째 전투에서 죽어버리죠...) 반면 약의 가격이 80이면 전투마다 20 골드를 벌 수 있는 셈이죠....

RPG 시스템이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원 관리가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말도 됩니다(본질적으로는 캐릭터의 발전 경로와 방법이 다양한 것이겠지만요). TSR 쪽의 RPG도 꽤 복잡한 편이지만, 역시 기억에 남는 것은 FF7의 마테리아 시스템입니다... FF7을 해 본 사람이라면 보스와의 전투를 앞두고 마테리아 장착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육성, 연애 시뮬레이션

육성이나 연애 시뮬레이션이야 말로 자원 관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르를 파라메타 게임이라고도 하더군요. 육성, 연애 시뮬에서 미소녀들과 이벤트들을 빼면 시간, 돈, 활동력(체력 등등)이라는 자원을 분배해서 원하는 특성 수치를 올리는 게임이 됩니다(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게임이 엄청 재미없어집니다...)

슈팅 게임

이런 장르는 기본적으로 순발력이나 민첩성에 초점을 둔 것이지만, 자원 관리의 개념이 예상외로 중요합니다. 역시 미국 이야기지만, 미국 군인의 전투 방법이란 적을 정조준해서 한 발 한 발 쏘는 것이라기 보다는 엄청난 탄약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눈을 감고, 그야말로 갈겨버리는거죠. 사실 현대전은 폭격으로 일단 상대편을 초토화시킨 후 보병이 전진해서 나머지를 소탕하는 것이 기본적인 전투 방식이죠...

퀘이크나 둠 류의 게임에서 권총 하나로 교묘하게 적들을 처치하는 것도 재미있긴 하지만, 역시 통쾌한 것은 머신건이나 로켓 런쳐로 적들을 그야말로 박살내 버리는 것일 겁니다.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레벨 탈출구가 눈에 보여도 그 레벨을 끝내지는 않습니다. 맵을 샅샅이 뒤져서 새로운 무기와 총탄들을 찾아헤매기 마련입니다. '관리'라고까지 하기에는 좀 억지스럽지만, 어쨌든 슈팅 게임에서도 '자원'이 중요하다는 점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작 측면에서 볼 때 레벨 디자인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무기와 탄약, 치료약을 배치할 것인가가 그 레벨의 난이도에 큰 영향을 미치겠죠....

제작 측면에서 본 자원 관리

첫번째로 드는 생각은, 자원 관리라는 측면을 게이머에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극명한 예가 연애 시뮬입니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의 시스템을 요약하면 '시간, 체력을 분배해서 과목 점수를 올리고 그것에 기반해서 상대 소녀의 호감도를 올린다'인데, 숫자 놀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미소녀와의 연애를 경험한다'라는 환상이 깨져 버립니다(반면 매니아 수준이 되면 수치 변화 자체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더군요). 이를 좀 더 일반화하면 '수치'라는 데이터를 게이머에게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죠. 예를 들어서 재기드 얼라이언스 시리즈의 경우 적들의 체력은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Strong, Healthy, Woonded, Poor, Critical 등으로 나타납니다. 게임이 좀 더 발전한다면 문자가 아니라 그래픽으로 표현하게 되겠죠(머리에서 피를 흘린다던가, 안색이 창백하다던가 등등). 수치로 나타나는 것보다는 일상 언어로, 더 나아가서 시각이나 청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쪽이 훨씬 더 게임에 몰입하는데 도움이 되겠죠.

두번째는, 자원 관리 시스템의 정교함입니다. 앞에서 레벨 1의 캐릭터와 약품 가격이라는 예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자원의 생성, 변환, 소비에 관련된 규칙이나 수식은 게임의 균형이나 난이도에 직결됩니다. 다른 예로,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글링의 생산 가격이 조금 비싸진다던가 생산 시간이 조금 더 느려진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게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교한 자원 관리 시스템을 위해서는 충분한 베타 테스팅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기획 단계에 수학적 지식에 기반한 수식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RPG 쯔꾸르로 만들어진 게임들을 보면, 약품의 효능이나 가격, 몬스터의 체력 등등을 대충 설정했기 때문에 게임이 너무 어렵거나 너무 쉬운 경우가 있더군요. 게임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개발자라면.... MS 액셀 같은 스프레드시트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타 생각들...

게이머의 입장에서 볼 때 자원 관리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은 재치나 순발력과 함께 '균형 감각'까지도 갖춰야 게임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균형 감각은 게임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더 많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컴퓨터의 발전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기대하는 것들을 점점 더 컴퓨터에서도 기대하게 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객체 지향 방법론에 대한 대부분의 책들은 가장 첫머리에 '소프트웨어의 위기'를 이야기하는데, 소프트웨어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그리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더군요. 소프트웨어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은, 기존 개발 방법론이 대상으로 하는 세계가 '수학적, 논리적 세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수학적 모델링 방법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원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죠. 미사일의 탄도 계산이나 세금 공제/급여 계산은 수학적 모델링으로도 충분히 포괄할 수 있었지만, 현대가 요구하는 소프트웨어는 현실 세계나 일상 업무를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표현하려면 엔진 용량이나 무게, 모델 번호 등등의 수치들을 파편적으로 분리시키기 보다는 자동자 자체를 하나의 객체로 표현해야 하는 시대가 온거죠... 어쨌든 컴퓨터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회 - 컴퓨터와 네트웍 사이의 경계가 더욱 더 희미해지는 방향이라는거죠. 저는 '인간 + 컴퓨터' 복합 지성체라는 개념도 좋아합니다. 컴퓨터를 켜지 않은 필자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필자는 다른 존재이며, 꺼진 컴퓨터와 필자가 앞에 앉아 있는 컴퓨터 역시 다른 존재입니다. 필자의 방에는 필자 , '필자 + 컴퓨터라는 복합 지성체', 컴퓨터라는 세 종류의 지성체가 존재하는 셈이죠.

이야기가 좀 비약했는데, 어쨌든 초창기 게임이 인간의 여러 속성들 중 '순발력'이라는 한 가지 요소만을 요구한 반면 게임이 발전해 나감에 따라 좀 더 다양한 속성들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런 경로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DDR은 순발력이나 민첩성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이해력과, 더욱 중요하게는 '체력'까지도 요구하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게임이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요구하게 된다면, 개개인의 게임 플레이 양상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다양해 질것입니다. 현재의 스타크래프트도 개인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전략이 존재하지만, 미래의 게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한 게임 전개 방식들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울티마 온라인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나는 게임으로 나의 존재를 표현한다'라던가, 게임 화면만 봐도 '아, 지금 철수가 게임을 하고 있구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될지도 모르죠....